2024. 1. 5. 16:22ㆍ삶의 지혜
한참 전 일이다.
2008년 중국법인에 잠시 근무하던 당시 고객사 품질팀에서 정기진단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고객사 사람들이 오게 되면 술을 엄청 사준다. 사준다기 보다 먹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대부분 고객사에서 업무적으로 오는 이유는 공장현황과 관리능력을 파악하고자 함이다. 그래서 공장에서는 현 상황보다 조금이라도 좋은 리포트가 올라가도록 애썼다. 적어도 책 잡히는 일은 없도록 해야 했다. 술을 많이 먹여 놓으면 제대로 된 검토가 어렵다. 회사는 그걸 노렸다. 일단 50도 넘는 바이주(백주)로 절어버리면 이튿날 점검은 물 건너간 일이 된다. 대리에서 차장까지 직급에 상관없이 그간 왔던 대부분이 그랬다. 꽤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런 생각이 깨진 것은 그해 겨울 양 차장을 만났을 때였다. 대리들 몇 명, 과장 포함 서너 명이 진단을 위해서 방문을 했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당일 저녁 술자리가 펼쳐졌다. 그날따라 유난히 술자리가 길어졌고 새벽 3시를 넘겨서야 마무리되었다. 주량이라면 뒤지지 않는 공장장이 비틀거릴 정도로 그날 술자리가 대단했다. 다들 다음날 아침은 업무가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출장자 중 막내였던 나는 사무실에 일찍 출근해서 당일 검토할 자료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넘겨다보니 회의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창문으로 회의실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양차장이 꽂꽂한 자세로 어제 진행됐던 내용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50도 넘는 백 주를 인당 한병 반을 마셨는데 멀쩡해 보였다. 여느 사람 같으면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은데 엄청난 술 꾼이라고만 생각했다.
아직 팀원들이 출근하기 이른 시각이라 양 차장님에게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4시 넘어 호텔 들어가면 분명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바로 들어왔어요."
그는 잠이 들면 그날 일을 보지 못할 것 같아서 간단히 씻고 나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50이 넘은 나이에 체력도 부족한 분이 정신력만은 무척 강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마인드로 업무를 하시는 분이었다. 이제까지 회사생활을 하면서 그때 이후로 그런 직원은 보지 못했다.
누군가는 이런 행동을 폄하할지 모른다. 오히려 아둔한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음주 자체를 하지 않았더라면, 혹 부득이하게 취해야 하는 상태라면 휴가를 내거나 남들처럼 느지막이 일을 시작해도 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특히나 요즘 젊은 친구들은 더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업무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높은 사람이라고 본다. 자기 업무와 맡겨진 역할에 충실하는 것은 직원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어렵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 보면 해낼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다. 오롯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회사의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런 직원을 보유한 그 회사가 더 대단해 보인다. 만일 내가 회사에 오너라면 이런 직원을 탐내할 것이다.
어느 회사는 초격차를 말하고 어느 회사는 몇 퍼센트만 앞서 가자고 말한다. 다른 회사에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차이를 만들어내 시장을 선도하는 전략, 반면에 어찌 되었든 경쟁자들보다는 단 몇 퍼센트 만이라도 앞서 있으면 된다는 전략. 둘 다 모두 상황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는 전략이다. 양차장은 초격차 전략을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서
자신을 차별화한 것이다. (덕분인지 훗날 임원까지 하시고 퇴직함)
나는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 이런 류의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정확히 2012년 이후로는 비슷한 사람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아마도 그게 회사에 분위기와도 관계가 깊은 듯하다. 그때 이후 내리막이니 싱크로율이 참...
누군가보다 조금 앞서 있는 것은 언제나 불안하다. 상황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역시 초격차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렌드가 어떻고 워크 앤 밸런스가 어떻고를 떠나 절대 불가의 법칙은 상대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나야 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비록 회사이든 회사가 아니든 간에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도태한다. 끝이 날카로운 송곳은 아무리 가려도 주머니를 뚫고 나오기 마련이다. 언제나 나 자신을 날카롭게 다듬어야 한다. 그래야 기회가 주어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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