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S는 야인이 되었다.

2024. 1. 10. 10:36삶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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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야인이 산다.


아마도 그때였던 것 같다.
S책임이 생산 담당으로 온 그 시점 말이다. 평생을 숫자만 만지던 사람이 어찌 된 영문인지 갑작스레 생산실에 담당이 되었다. 생산의 'ㅅ'자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모든 업무 회의는 그분의 스터디 시간으로 변모했다. 결정을 위한 회의가 아니라 현황 파악을 위한 회의가 돼버렸다. 기본 회의 시간이 두 배 이상 늘어난 건 물론이고 결정 없이 보류되는 일들만 쌓여갔다.

"제가 담당으로 온 이상 여러분들과 확실히 소통하며 새로운 생산실이 되게 하겠습니다. 잘 지켜봐 주십시오."

거창한 포부와 달리 초기에 조금 미흡하더라도 3개월만 기다려 달라며 한 발짝 물러섰다. 기존과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생산실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몇몇은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 1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그분의 생산에 대한 감각은 찾을 수 없었다. 여전히 생산에 대한 공부는 계속됐고 결정사항은 지연됐으며 미래 사업을 위한 인사이트는 차마 기대할 수 조차 없었다.

생산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현장 관리만이라도 나아지길 기대했다. 강성노조와 타협하며. 당근과 채찍을 고루 쓸 줄 아는 그런 능숙한 모습을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숫자만 보았던 사람이 인원관리라고 잘할 리 없었다. 현장과의 단절은 불가피했고, 중요한 시점에 결정이 지연되면서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어 갔다.

2년이 지나 결국에는 사업부장이 참지 못하고 생산 담당을 경질했다. 말 그대로 경질이다.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조직책임자가 불미스러운 일이 아닌 역량 문제로 경질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다. 그렇게 S는 야인이 되었다.

    그렇게 S는 야인이 되었다.

야인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우리들은 조직책임자 직책에서 어떤 이유든 내려와 평사원처럼 직무에 복귀하는 경우에 야인이 되었다고 표현한다. 대부분 책임급 담당이고, 조직책임자들 역시 책임급이기 때문에 직책을 내려놓으면 여느 사원들처럼 일을 해야 한다. 자신이 담당을 했든, 팀장을 했든 간에 어찌 되었든 '백의종군'해서 평사원으로 근무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야인전성시대


이렇게 야인으로 돌아오는 직원들이 부지기수다. 연구실장이었던 사람, 품질팀장이던 사람, 기술팀장이던 사람 등등. 연어 떼가 돌아오듯 인사철이 우수수 떨어진다. 돌아오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돌아온 이후가 더 큰 문제가 된다.

책임자 경험이 길지 않은 사람들은 그나마 형편이 좀 낫다. 꾸준히 업무에 대한 파악이 되어 있고, 운영시스템이나 현업 파악도 빠르다. 반면 10년 이상 조직책임자의 몸 담았던 사람들은 적응이 수월치 않다. 특히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나 회사 시스템을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매일 부하 직원한테 상세 내용을 보고 받고 결정하는 게 주 업무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서 이제 남은 것은 결정하는 하나의 기능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이제 써먹기가 어려워진 상태이다.
야인으로 남기 위해선 적어도 자신만의 업무를 가지고 처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은 있어야 한다. 그마저도 확보되지 않는 상태면 결국 이직을 고민해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이직은 결국 치킨집 사장님이나 PC방 또는 편의점 운영으로 이끈다. 그나마 투자금 안 까먹으면 다행이다.

구마적 형님 포스 지렸는데...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야인이 된다. 다만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야인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업무에서 멀어져 있으면 안 되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의 주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게 싫다면, 밖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준비를 해야 한다. 회사라는 방어막은 최고의 '아이언 돔'이다.
이 방어막 안에서 준비해서 나가지 않는 한 성공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모두들 알고 있지만, 준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렇기에 스스로 회사를 박차고 나간 인간들 중 제대로 성공했단 소식은 듣지 못했다. 나 역시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될까 봐 두렵다. 준비 없는 퇴직 후 야인에서 야생인으로 전락할까 두렵다. 언제나 건너편에 S책임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좀 더 심기 일전 해야겠다.

모든 야인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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