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12. 12:00ㆍ삶의 지혜
내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과거에 내가 무슨 일을 했건 간에 전부 다 기억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들과 일을 함께 하다 보면 가끔 불안감을 느끼곤 한다. 왠지 일과 상관없는 것들까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을 것은 막연한 두려움말이다. 회사에 그런 류의 사람들이 있다. 기억력이 특별히 좋은 그런 사람들 말이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 조직책임자라면 더더욱 두려울 수밖에 없다.
L 사업담당의 이야기
전에 모셨던 사업담당님은 서울대라는 학벌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특별한 구석이 없었다. 영업출신으로 대화에 능하기는 하지만 키도 작고 특별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봐왔던 사업담당님들 중 가장 두려운 존재가 바로 L담당이었다.
그는 기억력이 무서우리만치 좋았다. 개발실에는 일명 뻥카로 유명한 H팀장이 있었다. 평소 입으로만 일하는 스타일이라 해당 팀원들이 모두 싫어하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연구실장과 호형호재하는 사이이고, 회의에서 말발이 끝내주다 보니 누구 하나 불평을 할 수 없었다. 새로운 사업담당으로 L이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매달 현장점검을 진행했는데 해당 모델을 개발한 H팀장에게 사업부장이 질문을 던졌다.
"이 설비의 테이퍼 설정값은 얼마가 적정한가요?"
"생산속도와 품질 간에 상관지수를 감안하면 0.6~0.8 수준입니다."
"아, 네."
한 달 뒤 다른 라인에서 현장점검이 이뤄졌는데, 유사한 설비를 눈여겨본 L담당은 근처의 현장직원을 불러 테이퍼 세팅값을 물었다.
"1.2로 세팅되어 있습니다."
그 즉시 H팀장을 불러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 모델의 테이퍼값은 0.6~0.8 이 아닌가요?"
H팀장은 현장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로 그럴 것이 해당 팀장은 현장에 관심이 없었고, 알고 있던 수치도 대략적인 정보였기에 그 순간 모면하려고 둘러댔었다. 그런데 설마 담당님이 정확한 수치를 기억하고 다시 물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이런 유의 사건은 그 후로도 몇 차례 반복되었다. 이후 엔지니어들이나 개발자들은 사이에서는 사업담당 주의보가 발령되었다. 사업담당의 질문에 허투루 대답했다간 큰일 난다는 걸 몸으로 느꼈던 것이다. 사업담당의 질문이 이어질 때면 확실한 경우만 대답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확인 후에 재보 고를 드리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담당님의 머릿속에 수치들이 항상 정확하게 남겨져 있다는 소문에 서로 조심하게 되었다.
또한 L담당은 마이크로 관리의 대가로 유명했다. 조직책임자들이 대부분 큰 이슈에 대한 결정이나 방향만 제시하는 것과 달리 이분은 아주 디테일하고 작은 결정까지도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었다. 그렇다 보니 하위 책임자들은 더우 많은 정보를 알아야 했고, 업무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엄청난 기억력의 비밀
기록하고, 상기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기억으로 저장하는 게 중요하다.
L담당은 모든 걸 기록했다. 항상 품에 노트와 펜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를 기록하곤 했다. 단순 기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닌 항상 읽고 수정하며 되새김질을 했다. 다른 임원들이 술자리에서 허투루 시간을 보낼 때 그는 그렇게 자신의 실력을 다졌다.
사실 한번 보고 그 많은 정보를 기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결국 필요한 상황에 머릿속에 정보를 꺼내 쓸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자신의 기억을 유지하는데 메모만큼 좋은 방법도 없는 것 같다. 노트나 수첩이 될 수 도 있고 스마트폰이라도 상관없다. 다만 기록하고, 상기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기억으로 저장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가장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건 마인드인데, 이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머릿속에 남기겠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대충 한번 보듯 쓱 봐도 기억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의미이다. 작성한 기록의 중요성을 알고 간직하겠다는 마음이 중요하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길은 다양하다. 능력으로 보여주고 자신이 대체 불가한 사람이란 걸 인식시키면 된다. 업무에 대한 인사이트가 뛰어난 사람도, 프로젝트 기획이 뛰어난 사람도,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는 능력도, 일의 추진력이 좋은 사람도 모두 인정받을 수 있다. 그중에 기본은 자신의 일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머릿속에 새기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정보가 필요하고, 추진력 있게 판단하기 위해서도 기억력이 좋으면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두렵고 무섭다는 건 내가 가지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없는 부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스스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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