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ㅇ난감'이 말하는 정의

2024. 2. 26. 14:45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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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정의가 사회 모든 사람들에 관심을 끌었던 적이 있다. 덕분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었다.
또한 공기업에서 채용한 비정규직에 대해서 수험생들이 들고일어나 정의를 부르짖으며 항의를 한탓에 이슈가 된 적도 있다. 학생에서 노동자 그리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정의에 대해서 민감하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결국 불의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행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보통 정의를 얘기할 때 우리가 헷갈려하는 부분이 공평이라는 단어이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취급받는다는 것을 정의와 혼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는 공평이 아니다.

최근 Netflix에서 '살인자ㅇ난감'이라는 시리즈가 꽤나 인기이다. 덕분에 나도 전 시리즈를 며칠에 걸쳐서 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리즈에서 정의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인지 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정의는 그의 미가 사뭇 다르다.

'살인자ㅇ난감'에서 말하는 정의란 바로 참여라고 생각한다. 불의를 보았을 때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적극적인 참여를 말한다. 결국 정의에 대한 이 탕과 장난감, 노빈 그리고 송촌의 시각차에 대한 이야기가 극을 이끌어 가는 기본 축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인 이 탕(최우식 분)은 우연한 기회에 살인을 하게 된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죽은 사람마다 이미 죽어 마땅한 짓을 골라했던 사람들이며, 그를 지목하는 증거들은 약속한 듯 사라진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을까 마는 아무래도 악행을 많이 저지른 사람은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대전제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그래서 죽였어요?


이 탕이라는 주인공을 쫓는 형사인 장난감은 주위에 시선의 억눌린 채, 우습게 보이지 않고자 형사가 되었다. 아버지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범인을 쫒기 위한 개인적인 이유 역시 포함된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죽어 마땅한 놈들이 살해되는 모습을 보고 일말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반면 그는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단죄할 수 없으며, 살인은 역시 살인일 뿐이다.

저에게 계획이 A부터 Z까지 있습니다.


시리즈에서 흥미로운 캐릭터가 하나 나오는데 바로 노빈이다. 외모부터 정겨운 그는 극의 신선함 을 불어넣었다. 노빈은 정의를 구현하고자 노력하지만 스스로 능력이 부족함을 깨닫고 다른 강한 사람의 힘을 빌리고자 한다.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살인자 송촌이며, 이 탕이다. 첫 번째 시도의 결과물인 송촌은 기대를 벗어나 폭주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 좀 더 다듬어진 노력으로 발굴된 인물이 이 탕이라고 할 수 있다.
노빈은 확실하게 사회에 필요 없는 쓰레기들을 청소해야 한다라는 입장이다. 그런 쓰레기들이 하나 둘 정리되면서 사회의 모든 관심이 정의를 위해 쏠리기를 원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확실한 확신의 소유자인 송촌이 등장한다. 송촌은 과거 제대로 된 형사가 되길 꿈꿨다. 하지만 살인자였던 부모 탓에 알 수 없는
벽에 부딪쳐가며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결국 우연한 기회 자신의 동료 형사였던 장갑수 형사의 비리를 알게 되고, 결국 몸싸움 끝에 그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어찌 보면 이 시리즈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애처로운 캐릭터인 듯하다. 사회를 정화하겠다고 행한 정의이지만 그가 행한 방식은 과격한 정의였고, 그를 인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시리즈 중에서 단연 기억에 남는 장면은 송촌이 탕을 불러서 확인하는 장면과 대화이다. 그는 이 탕이 죽어야 할 인간들을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궁금해했다. 또한 이 탕이 정의를 실행할 만한 확신이 있는가 확인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탕은 그저 우연하게 살인을 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부턴 그저 살인자 중 한 명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듯 보인다.
우연으로 죽였다고 하너지라도 살인은 살인이라는 것이다. 확신이 없는 살인은 결국 정의가 아니라고.

니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
어릴때부터 남들에게 피해줘도
암말 안한 니 부모들이 문제지





'살인자ㅇ난감'에서는 이름에 걸맞게 살인이 많이 발생한다. 대부분 악질 범죄자에서부터 죽어 마땅한 파렴치한까지 시청자들이 대리만족을 갖게 한다. 하지만 내가 눈여겨본 것은 또 다른 살인 장면이다. 정확히 말하면 미수에 그쳤던 살인이다. 장난감은 아버지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치료를 연명할지 말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가 만일 아버지의 연명 치료에 대해서 더 이상 치료 의사가 없다고 표현했다면 그 역시도 같은 살인자가 아닌가 싶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비단 총, 칼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려는 것 같다.

이 시리즈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을 나는 살인과 정의에 대한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살인과 정의에 대한 기준은 확신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보통 악인들이 살인을 하거나 우발적인 범죄를 저지를 때는 확신이라는 게 없다. 이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다.
만일 철천지 원수를 계획하에 살인한 사람이 있다면 이 시리즈의 기준에 의한다면 그 사람은 정의를 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죽어도 된다는 명백한 이유를 가지고, 확신에 차서 행한 살인이라면 정의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007이 범죄자를 없애고, 어벤저스가 침략자를 제거하고, 안중근의사가 이토를 암살하는 것을 살인으로만 보지 않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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